2012/01/11 19:20

내 생애 가장 고상했던 그때

부스럭거리는 사소한 소리에도 집중이 안 될 때, 
아이튠즈 라디오 클래식 채널을 듣는다.
선택은 언제나 하나. 바로크 음악을 틀어주는 all baroque music. 
오늘도 기계적으로 그 채널을 찾아 클릭 클릭을 했는데, 

Lisa Beznosiuk가 연주한 바흐 플룻 소나타가 흘러나왔다.
저렇게 어려운 Lisa Benz~ 라는 이름을 내가 기억할리 없다. 
그런데 곡의 순서와 연주자의 숨소리, 약간은 탁한 그 음색이 나 중학교 시절 들었던 그 음반임을 
몸이 먼저 알아챘다. 채널을 클릭했더니, 연주자 이름이 나왔다. 아, 저런 이름이었어. 맞아.
두근두근.

바흐의 곡을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플룻 연주회에서 선보였다. 
바흐의 다른 곡은 들어본 적 없다. 내가 연주할 10분 남짓의 플룻 소나타 소품 두어 개가 내가 아는 바흐의 전부다.
그때, 바흐가 너무 좋다고 생각했다.
악기 연주법을 막 배우기 시작한 중학생이, 바흐가 너무 좋았던 건, 진심으로, 머리보다 몸으로 좋았던 것이다. 
아이튠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 음악, 연주회 전에 밤이고 낮이고 듣고 다녔던 그 CD와 같은 순서로 흘러나오는 전개가
내 생애 가장 솔직하고 고상했던 중학교 시절을 마치 만질 수 있는 물건인양 생생하게 꺼내놓았다. 
내가 참 좋아했던 플룻, 마우스피스만 골드이고 키가 달린 관은 반짝거리는 은빛이었던 플룻은 
지금 친척 조카가 쓰고 있다. 그 아이가 플룻에 흥미가 있다길래, 난 도통 그걸 다시 불지 않을 것 같아서 선물해주었다. 

지금은 연주법도 다 잊어버리고 플룻도 없지만
몸이 기억하는 감각은 절대 없어지지 않아서 고맙고 소중하다. 

음악은, 역시, 너무나 강력하다. 


 

2011/12/30 11:11

프랑스 공공디자인

파리에 사는 작가가 나한테 뭐 보낼 게 있다고 했는데, 그걸 오늘 아침에 받았다.
규격봉투에 얌전하게 들어있었다.
우리나라 우체국에 가면 파는 50원짜리 규격봉투. 프랑스에서도 그걸 팔겠지. 몇십 센트에.
그런데,
규격봉투 시크 쩔어.
공공디자인이 훌륭한 나라가 선진국이다.

2011/12/29 14:48

지금은 철산 시대 - 림스치킨 편

풍뎅이 가스버너가 차곡차곡 진열된 림스치킨.
철산 주공아파트 9단지의 사랑방.

아줌마 배달도 해요?
아유, 우리 아저씨가 하두 술을 먹어가지고오, 배달을 하긴 하는데 못할 때가 더 많어. 그냥 와서 사갖고 가. 그게 빨러.

치킨 맛이 끝내주는 림스치킨의 미장센은,
아이와 컴포넌트, 필레오(이게 뭐임?) 냉온수기, 빈 공간엔 컴플리멘터리 안주과자, 그리고 총천연색의 조악한 조화.


2011/12/29 14:43

지금은 철산 시대 - 목욕탕 편

이건, 과연 목욕탕일까.
아우라, 포스, 오라, 흡입력, 역동성 넘치는 철산동 한양사우나 상세컷.
여기 찜질방에서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탈의실이 나오고, 거긴 심지어 키친이 있다. 싱크대와 함께.
탈의실에서 만둣국을 판다.
벌거벗은 여자들은 만둣국을 사들고 건식한증막에 들어간다. 땀을 빼면서 후루룩 후루룩 만둣국을 떠서 입에 넣다가 누군가 한증막에 들어오면 눈만 치켜뜨고 그를 바라본다.





이건 대체, 머야.
너무 치명적으로 독특해!


2011/11/21 15:06

지금은 철산 시대

우리가 대체 뭘 어쨌길래 독립을 그렇게도 외치느냐. 

엄마 아빠는 도통 알 수 없다는 얼굴로 같은 말을 200일이 넘도록 반복했다.
구구절절한 편지를 써서 간신히 부모님 마음을 움직였고,
독립을 했다.
여기는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 (길이름은 심지어) 모세로. 
잘 살아보기 위해 간증이라도 해야할 것 같은 길이름 모세로. 
그것 빼곤 다 마음에 드는 오래되고 작은 아파트로 거처를 옮겼다.
열 평 남짓한 크기에 공간이 오밀조밀 나뉘어있는 점이 마음에 든다.
거실은 침실로 쓰고,  작은 방은 옷장으로 쓰고, 큰 방은 서재로 쓴다. 

혼자 있기 때문에 
거실을 침실로 쓸 수 있고, TV를 없앨 수 있으며, 책상만큼은 내 분수에 안 맞는 과하게 좋은 제품을 고를 수 있다. 
대신 좋은 세탁기와 냉장고는 깨끗이 포기했다. 
가구를 벽에 딱 붙여서 놔야 할 필요는 없다. 
50cm쯤 떨어진 자리에 마음을 빼앗긴 책상을 놓고 창밖을 바라볼 수 있다. 
내가 여기기에 가장 적당한 거리를 두고. 
모든 옷가지와 머플러, 온갖 소프트웨어적 웨어를 한자리에 놓아두었다. 
오늘의 복식에 가장 잘 맞는 벨트를 고르기 쉬워졌다. 
니트류는 돌돌 말아서 뽑아 입을 수 있게 작은 책장에 꽂아서 정리했다. 
롯데마트에서 가재도구를 사자는 엄마를 끌고 기어이 킴스클럽으로 향했다.
주방도구를 고를 땐 기능(만)주의자 엄마의 쇼핑 스타일에 당당히 안티하고, 
오크색 손잡이가 달린 국자와 뒤지게,  미송나무도마를 샀다. 난 기능+디자인(둘다)주의자.  
하나하나의 값은 비싼 대신 가지수를 줄여 낭비를 했단 생각은 안 든다. 
휴지통은 안 사고 아네스베 머그컵이 들어있던 골판지포장박스를 쓰기로 했다. 
물건을 놔두는 것부터, 휴지통 하나를 고르는 것부터 내 취향이 묻어나는 게 독립이라서, 
그렇게도 원했던 거다. 
(전세금을 내손으로 마련하지 못한 건 뼈아픈 현실이지만, 이건 어떻게든 해결을 볼 생각이다. 이 생각만 하면 가슴이 찌릿;)
혼자 살게 되면 내 취향과 가치관이 투명하게 드러날 거다. 
나의 취향을 또렷히 아는 건 아주 본질적인 문제다. 
휘둘리다 보면 돈이고 시간이고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좁은 베란다 창을 열면 손 닿는 위치에 대추나무와 감나무가 있다. 
대추나무에 대추 하나, 감나무에 감 하나, 딱 한 개씩만 남아 있는 초겨울에 접어들었다.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충만하고 따뜻하다. 
어젯밤에 보일러가 고장났었는데, 좀 전에 친절한 린나이기사가 고쳐주고 갔다. 
더없이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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